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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보도자료

 
노영범 원장의 '나의 인생 이야기'
최고관… 작성일 : 12-11-26 15:03 조회 : 16,158

-사람과 행복 그리고 한의학-

 오늘은 제가 그동안 걸어왔던 인생을 편안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아무런 가감없이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처음 풀어내는 인생스토리라 혹여 오해를 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지만 진솔된 마음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꾸미지 않고 러프하게 있는 그대로 단어를 선택해서 전달하려고 하니 편안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머리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쓰고자하니 표현이 미숙하더라도 가슴으로 받아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생에 모토 중에 하나가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휴머니스트란 단어를 매우 좋아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삶을 추구하고 있으며, 자신이 먼저 가장 행복하고, 내가 하는 일이 행복한 일이 되고, 그 다음 점차적으로 내 가족이 행복해 하고, 우리 사회가 행복해 하고, 인류가 행복해지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한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행위하는 모든 것이 행복하게 꾸려져가면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 하면 저는 잘 살아가는 인생일 것입니다. 특히, 한의학을 통한 임상에서 제 스스로가 행복해 하고, 한의학 공부가 행복하고, 나로 인해 환자가 고통에서 해결되어 행복해 할 때 그리고 그러한 학문적인 방법들이 인류에게 공헌하고 인정을 받는다면 저로써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며 잘 살았다고 평가가 될 것 같습니다.

 저는 58년도에 경남 진해 빈농의 집에서 모친이 마흔살에 출생한 노인의 자식으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흔한 58년 개띠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생존경쟁의 최극인 전후의 베이비부머 세대입니다. 그 시대는 누구나 다 그렇듯이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저희 집 환경도 가난에 찌든 생활을 영위했고, 고구마,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 하루 생활고에 시달리니 저라는 존재는 당연히 계획에도 없었고 원하지도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우연히 저의 어머님과 옆집 할머니께서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바깥에서 듣게 되었는데, 저를 임신중에 낙태시키려고 담배 달인 물을 드시고 뒹굴었다고 하면서 제 생명력이 모질고 끈질기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저는 어린나이에 엄청난 충격으로 울면서 최초로 가출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방목되다시피 성장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히려 요즘 소위 말하는 웰빙라이프인 셈입니다.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세상 물정 모르고 그 때 환경이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고 해맑게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초등학교 졸업 후 40주년 행사시에 각자 돌아가면서 친구들의 인상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저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가 공부 잘하고 착하고 순수하고 평화주의자였고 늘 만면에 웃음 띤 얼굴이었다고 기억들을 해주더군요. (좋은 건 다 있죠. 결코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들은 그대로 전달해드립니다. 혹 오해 없으시길) 그런데 하나 특징은 늘 얼굴이 창백하고 힘이 없어보여 꼭 병자같은 인상이었다고 말들을 하는 것을 듣고서 저에 대한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집에서도 부모, 형제들에게 늘 인정받고 심부름 잘하고 인사성 밝고 그 시대에 열악한 환경치고는 귀여움과 사랑을 듬뿍 받았던 유년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늘 저를 발목을 잡았던 것은 ‘건강’이었습니다. 사흘이 멀다하고 감기 몸살에 끙끙 앓기를 다반사로 하였습니다. 급기야 초등학교 2학년쯤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관절이 붓고 열이 나면서 절뚝거리면서 걷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저희 집은 초비상사태가 터졌고, 저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흔하게 돌던 소아마비로 예상을 했던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저희 어머님은 일반의원에 데려가지 않고 진해 황약국이라는 유명한 한약사(?)에게 저를 치료시키러 갔습니다. 정식약국인지 아니면 무면허 의료업자인지는 분간이 지금도 안 되지만 하여튼 가정집 온돌방에서 저를 진단하고 복부에다 뜸을 뜨고 (지금도 뚜렷하게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노란가루약을 며칠분 주었습니다. 계란노른자에 타서 먹으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排膿散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는 하루걸러 뜸시술을 받으러 갔었고, 그 약사분이 저보고 어린나이에도 잘 참고 시간  잘 지켜오고 해맑다며 기특하다고 칭찬을 자주하시면서 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 그 때 그 할아버지의 인자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마음을 너무 편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재미도 있고 신기하기도하고 할아버지가 너무 푸근해서 자주 놀러가는 마음으로 치료를 열심히 하여 끝냈습니다. 어찌되었던 약 3주만에 다리가 깨끗하게 치료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한의학을 통한 치료의 첫 경험이었고, 저로서는 어린 시절에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억을 까마득히 잊었다가 10여년 후에 제가 한의학에 입문하게 되리라고는 그 당시로써는 예측조차 못했습니다. 그 후에 얼마 안가서 또 한번 축농증이 발병하여 희한한 가루약을 받아서 코에 삽입을 며칠하였더니 축농증도 말끔히 치료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여분의 가루약을 보관하고 있다가 대학시절 성분을 분석하겠다며 혹시 신약개발이나 할 것처럼 소중하게 보관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 분은 저에게 한의학에 대한 또한 인자하신 모습의 소중한 추억만을 남기고 돌아가신 것 같았습니다. 어린시절 감기 고열 몸살은 늘 달고다니고, 소아마비 전조증상(지금생각해보면 근육에 무리가 가서 생긴 것 같습니다. 아마도 桂枝加芍藥湯이었으면 쉽게 해결될 상황 같습니다.) 그리고 축농증까지 그야말로 질병을 늘 달고다니는 병약한 어린시절이었습니다.     

 병약한 몸으로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공부는 대체적으로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학창시절이라 중학교에서 최상의 탑클래스는 아니었지만 상위권에 들 정도의 실력은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시에 마산 M 고등학교에 40명만 커트라인을 정하여 원서를 발급했는데, 저는 어렵지 않게 무난히 원서를 접수하러 갔습니다. 원서를 접수하러 가는 진해서 마산까지 40분정도 버스를 타는데도 저는 지독한 차멀미로 거의 실신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늘 차를 못탈 정도의 차멀미가 있었는데 그날은 유독 긴장해서 그런지 차멀미가 심하여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학교측과 저희 집에서는 3년간 이런 식으로 통학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저도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마침 진해 J고등학교에서 장학생을 물색하러 교무실로 스카웃을 왔다가 제 이야기를 전해듣고서, 3년 후에 서울의 최고 대학만 들어가면 3년간 고등학교 장학금과 대학교 4년간 하숙비와 학비를 제공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고. 저는 망설임없이 승낙하였습니다. 당연히 저는 수석으로 입학할 줄 알고서 느슨하게 공부를 하다가 2등으로 입학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옵션과 수석을 놓친 상황이 오늘 날 제가 한의학으로 진로를 택하게 된 변곡점이 되리라고는 그 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독을 품고서 1등을 놓치면 안되었고, 반드시 서울의 S대를 가야만 하는 강박증의 족쇄가 되어 저의 한계를 벗어나는 무리수를 일삼는 행보를 자청하게 되었습니다.

 아이큐도 그리 높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 성적을 유지하는 경향인데, 더구나 병약한 몸에 욕심만 앞세워서 죽기살기로 공부에 몰입하여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한 안간힘에 무리수를 점점 두게 되었습니다. 한계점은 뚜렷이 보이는데 주변의 시선과 얄팍한 자존심에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도 아깝고 친구들은 저를 자꾸만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것이 저로써는 다급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저는 원래 친구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참 좋아합니다.특히 뜻이 맞는 사람은 희열을 느낄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묘책을 쓴 것이 은둔생활을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집에서 떨어진 한적한 산 밑에 허름한 움막집 비슷한 집을 세를 얻어서 친구 몰래 숨어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처절한 자구책이었습니다. 이 행보가 저의 고통이 시작되는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능력 밖의 욕망에 눈이 멀어서 인생전체를 망가뜨리는 우를 처음으로 자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었지만,아마도 저는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이런 방식으로 저를 몰고 갔다고 지금은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시에 계약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저는 수모를 당하는 일이었기에, 단순한 이 논리에 얽매여 내 몸이 피폐화 되어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갔다오면 움막집으로 바로 가서 새벽까지 공부하고 아침에는 가방을 들 힘이 없어서 저희 아버님이 아침마다 오셔서 학교까지 자전거로 실어다주시곤 하셨습니다. 지금 연상해보면 저는 피골이 상접하고, 매일 코피를 흘리고, 진땀을 삐직삐직 흘리고, 어깨는 축처져 있고, 금방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이제사 알게되었지만 오랫동안 앉아서 공부하는 동안 太陰病의 복만과 胸下結硬의 상태가 유발되어 큰 질환을 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글 말미에 자세하게 설명을 할 것입니다)

 제 인생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 운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어찌나 욕심이 많았던지 남들이 노는 명절이나 공휴일에 이때 공부를 해야 앞지른다고 생각을 할 정도로 어쩌면 무모한 생활의 패턴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물며 어쩌다가 도시전체가 정전이 되었을 때 다같이 쉴 수밖에 없으니 안도하며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던 순간일 정도로,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못 참는 기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1975년 제 나이 18세 고등학교 2학년, 10월10일 수학여행을 앞두고 여행에 다들 들떠 있을 때 저는 바짝 당겨서 공부를 마무리하고, 경주로 여행을 떠나리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학여행 가는 기차에 모두들 여행기분으로 시끌벅적한데 저도 어울려 놀려고 하였지만 어쩐지 몸이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어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공부만 잘하면 학생 간부를 다 맡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병약한 몸에 직책을 무려 여덟개까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2학년으로 전교 선거유세를 해서 전교 부회장으로 당선되어 전교생의 리더로 학생들의 총수를 자임하여 모든 것을  주도하였고, 하여튼 사방팔방 독무대로 종횡무진 했었습니다. 학급반장, 영어서클회장, 리더십 동아리 목우회 회장 등등 정말 미친 행동을 자초했던 것 같습니다. 수학여행 중에도  몸은 점점 썩어들어 가는데 그  와중에도 전교부회장이란 직책으로 학생들을 진두지휘하다가 마침내 기차 안에서 많은 학우들 앞에서 시커먼 피를  토하고 장렬하게(?) 쓰러졌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었고 뭔가 웅성거리고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얼굴만 어른거리고는 꿈결같이 가물가물거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눈을 떠보니 병원에 누워있었고, 아버님, 어머님, 누나, 형님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크게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자주 아팠기에 제가 최근에 공부에 열중해서 과로로 그런 줄로만 알고 푹쉬면 낫겠지 생각을 하면서도 수학여행을 친구들과 함께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진단결과가 나온게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폐결핵말기. 공동이라는 균공동체가 뚜렷하게 잠식하고 있는 X-ray 사진이었습니다. 어린 소견으로도 왼쪽 폐 한 쪽이 허옇게 음영이 된 것이 결핵균으로 인해 망가진 느낌으로 보였습니다. 거의 사망선고였습니다. 주치의는 애를 이 지경까지 어떻게 방치했냐고 오히려 저희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질타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저도 “아 ! 이제 꽃도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는거구나.” 생각하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때가 생각나 북받쳐서 눈물이 납니다. 실컷 울었습니다. 오랜만에) 병원비도 원활치 않고 해서 집으로 퇴원을 했습니다. 집에서 누워있는데 옆방에서 가족들의 한숨 섞인 탄식의 소리들만 들려왔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제 의지와 관계없이 부모 형제에게 걱정만 끼쳐드리는 불효자가 된 것 같아서 더욱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당시 저를 끔찍하게 늘 보호해주는 바로 윗 형님이 결핵성 늑막염이라는 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중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천벽력이 떨어진 것입니다. 가정에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후 형은 저를 위해서 비켜주겠다며 의리있게 사나이답게 군대가서 죽어도 죽겠다고 자원입대를 해버렸습니다. 지금도 근 임상 30년 동안 저희 한의원에서 사무장으로 평생을 저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평생 잊지못할 은인입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나만은 부모님께 걱정 하나도 끼쳐 드리지 않고 성공해서 훌륭한 아들로 떳떳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절실하였는데 그것을 내 의지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는데(어려운 문제란  디테일하게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하여튼 최악이었습니다. 가정사라 일일이 밝히기가 힘들어서 그냥 상상에 맡깁니다.) 저까지 걱정의 짐을 지게하니 정말 죽고싶은 참담함이 엄습해왔습니다.

 그 시대에 폐결핵은 사망하는 질환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특히나 공동이 생긴 말기로써는 회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염성 질환이라 격리수용을 반강제적으로 실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저도 어쩔수없이 마산결핵요양소에 붙들려 수용되었습니다. 보고싶은 어머님과 가족과 친구들을 멀리하고 끌려가는 제 가슴은 이루 표현할 길 없이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길이라는 생각에 어린 저에게는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수용소 첫날 너무나 놀랐습니다.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칩니다. 수용된 환자들이 거의 죽은 송장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들어가 있고 전부 비쩍 마른상태로 기침과 가래 뱉는 소리, 각혈하는 사람, 그러다가 실제로 제 옆에서 죽어서 실려가는 장면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 같았습니다. 아! 나도 얼마 지나지않아 저렇게 죽어가겠구나 싶으니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부모 형제들도 대안이 없으니 착한 저를 여기다 쑤셔넣었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어린 마음에 원망보다 그 분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냐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여기에 보내고 어머님이 컴컴한 장독대에 물 한 컵 떠놓고 기도하면서 얼마나 울고계실까. 여기에 생각이 머무니 저도 주체할 수가 없이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고 또 쏟아지고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님을 떠올리면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괴롭습니다. 그 후로 돌아가실 때 까지도 착한 우리 영범이 영범이 하면서 유독 막내인 저를 가슴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여담이지만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도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저 같은 착한 아들을 두고 죽는다는 게 억울하다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저는 매일 밤을 어머님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하루에도 눈을 뜨면 내 옆에 있는 환자가 죽어나가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내가 죽을 수가 없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행여 죽더라도 내 어머님 품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경계는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경계를 철저히 안 해도 도망칠 기력들이 없었기에 저는 개중에 그래도 젊은 나이에 그나마 기력이 있는 편이라 미리 보아두었던 철조망 사이로 빠져나와 도망을 쳤습니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에 잡히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달리고 달렸습니다. 흡사 쇼생크 탈출을 연상하면 비슷한 상황으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마산 가포에서 진해까지 걸어서 갈 심산으로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수용소 탈출에 일단은 성공했고, 뛰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걸어서 걸어서 가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트럭에게 부탁하여 겨우 차를 얻어탔습니다. 그 운전사는 처음에는 죄수가 감옥에서 탈출한 탈주범으로 오인하여 몹시 경계하였으나 이것은 환자복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더니 기꺼이 진해입구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저는 한밤중에 환자복에 다 죽어가는 형상에 꼭 거지같은 행색으로 진해시 입구에서 집까지 걸어가면서 그래도 내 고향 우리집 앞에서 죽게되어 그나마 행복하다라는 마음으로 겨우 겨우 걸어갔습니다. 아! 그때의 새벽 찬 공기는 잊을 수 없을만큼 상큼했습니다.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짧은 시간이지만 엄마 곁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새벽 한밤중에 집에 들이닥친 저는 “엄마! 엄마! 나 영범이. 죽어도 좋으니 엄마 옆에만 있게해줘. 거기 죽어도 가기싫어” 라며 엄마를 안고는 울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저희 엄마는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안보내마. 미안, 미안,잘못했다며 얼마나 우시는지 엄마의 울음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포근한 밤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엄마의 품에서 행복하게 잤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생과 사의 투병생활로 접어들었습니다.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던 집에서 격리수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에서 좀 떨어진 제황산이라는 산 밑에 집을 구해서 독방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산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이나, 에탐부톨, 리팜핀 등 결핵 양약을 일정하게 복용하고, 어머님이 결핵에 좋다는 모든 민간요법을 해주시면 먹는 것이었습니다. 솔잎진액, 굼벵이, 지렁이, 불개미, 개소주, 생쑥즙, 소머리곰국, 심지어 초산인 남자태아의 태반을 생걸로 먹게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안 먹은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생태반은 산부인과에서 간호사에게 몰래 부탁해서 어머님이 어두컴컴한 장독대에서 요리를 해서 김에 싸놓으면 어머님께서, “영범아 생선회 무쳐놓았으니 너만 살짝 먹어라”고 귀뜸을 해주면 저는 태반인줄 어렴풋이 알았지만 어머님의 정성에 어찌되었든 살아서 보답하겠다는 각오로 눈물을 머금고 구역구역 올라오는 것을 참으면서 먹었습니다. 제가 예상해도 100개의 태반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모범적이고 성실함 하나만은 덕목으로 가지고 있던 터라 투병생활 3년동안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절도와 금도의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생의 집념이 대단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정성을 봐서라도 저는 반드시 살아서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투병생활 내내 주로 제가 하는 일과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먹을거리와 가벼운 책들, 그리고 노트를 챙겨들고서 산으로 올라가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나무 밑에서 쉬었다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책도 읽다가 명상도 하다가 참회하는 글도 썼다가 감상에 젖어서 시도 썼다가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산에서 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그 당시에 끄적거렸던 글귀의 노트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끔 뒤적거리다보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나름 그 당시 진지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얼핏 기억나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오늘 호두까기 소리를 내며 이 산을 오르내리는 한 소년이 살아서 성공해서 다시 이 산을 찾을 것이다.”라는 갈망을 피력한 글귀도 발견했습니다.) 해가 지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집으로 내려와서는 (동네사람들이 평일날 왜 학교에 안가냐고 자꾸 물어보니 귀찮고 자존심이 상해서 피해다녔습니다.) 저녁밥을 먹고서는 또다시 산 밑에 움막집에 올라가서는 음악도 듣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하루 일과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타임스케쥴대로 견뎌내었습니다. 병마와 싸우는 적극적인 최선의 방법은 오히려 절도있는 생활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산증인처럼 표본처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생활패턴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당시에 자연과 벗삼고, 시간이 너무나 많으니 좋은 음악도 무수히 많이 듣고, 그림도 그리고, 수많은 명서들을 섭렵을 했습니다. 유명한 고전서적은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때에 쌓았던 교양과 수양이 오늘날 어쩌면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또한 너무나 나약하고 불안해서 산 밑에 있는 조그만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절박한 심정에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멋모르고 순복음동산교회라는 교회에서 혼자서 기도하고 집에서도 늘 기도하고는 했습니다. 점점 믿음이 강해져 새벽기도도 가게 되고 부흥회도 가게되고 많은 부분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지만 절대절명의 순간에 30일 작정기도를 하다가 꿈속에서 십자가에 시커먼 독수리가 화살을 맞고는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꿈을 꾸고서는 내 마음속에 확신이 서기를 “내 병은 나을수가 있겠다”는 믿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기적적으로 만 2년만에 폐결핵은 완치판정을 받았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습니다. 완치판정 받던 날 너무 기뻐서 집으로 달려가 또 한번 어머님을 부둥켜안고 저를 살려주어서 고맙다고 울부짖으며 정말 정말 감사하다고 어머님의 은혜 평생 잊지않겠다고... 그 당시 2년동안 낮에는 책을 들고서 제황산 산 속에서 책보면서 기도하고 어두우면 방에서 음악듣고 또 기도하고..,, 그 때 기도의 제목은 “하느님, 하느님이 정말 계신다면 착한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느님이 혹 뜻이 있으시면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저를 통해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뜻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에게 투자 한번 하십시오.” 이런 제목으로 기도를 반복해서 주문을 외웠습니다. 이 기도가 통했는지, 아마도 저는 하느님이 뜻이 있어서 저를 살려주셨고, 저는 그 후 덤으로 살고 있고, 그 때 기도처럼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궤도를 이탈하여 오만하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추스르고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사람인지라 흐트러질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겸허하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 한 켠 늘 마음이 무겁고 죄인 같은 심정으로 살고있습니다. (대학시절과 결혼 후에 공백기를 가지고, 많은 세월이 지나 3, 4년 전에 저는 아내의 권유로 카톨릭에서 세례를 받고 요한레지스라는 세례명을 받은 후 참된 삶을 살아야하나 또 그러지 못해서 이제는 하느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폐결핵만 완치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또 그러지 못했습니다.병은 나았으나 몸은 완전하게 회복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여전히 지치고 힘들고 쓰러지기가 다반사고 정상적인 생활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들이고 저는 중학교 졸업장밖에 없고,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저를 또 괴롭혔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불안감과 우울감이 엄습하면서 밤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모두가 잠든 밤에 하얗게 지새우는 고통은 꼭 죽고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루도 못자는 날이 1년이 넘게 지속되었다면 믿지 못하실 것입니다. 할수없이 신경정신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부산에 모 신경정신과를 2주만에 찾아갔습니다. 약먹고 주사맞고 반복되는 진료와 치료에도 전혀 진전이 없고 오히려 사람만 쾡하고 멍청하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한 고비 넘으니 또 한고비, 몸만 나으면 모두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지독한 마음의 병은 오히려 사람을 바짝바짝 말리면서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루는 신경정신과에서 주사를 맞고서는 바로 집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 날은 저도 오기가 생겨서 광복동에서 늦게까지 구경하며 지체하다가 약기운으로 부산역 앞 아리랑호텔 계단에서 쓰러져 자버렸습니다. 몽롱하게 쓰러져 잤던 것입니다. 흡사 노숙자 형국이었습니다. 몇시간이 지난 후 겨우 몸을 비틀거리면서 버스를 탔는데 서서 지탱하기가 힘든 상황에 꼭 마약 중독자와 흡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보다 연상인 천사같은 분이 자리에 앉혀주시고 개금동에 있는 저희 누님집까지 데려다준 분이 있었는데 너무 고맙지만 인사도 못했던 그 분은 아마도 복받고 잘 살고 계실 것입니다.

 아무튼 고통의 연속으로 저는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버렸습니다. 자포자기 상태로 하루는 불쑥 그냥 멀리 떠나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진해 경화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서는 어디든 가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심산으로 생을 포기하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삼랑진 가기 전에 제 좌석 앞에 흡사 부처님같은 상을 하신 할머님이 저를 자세히 쳐다보시고는 혀를 쯧쯧 차시면서 청년의 안색이 너무 안 좋다고 하시며 다짜고짜 자기를 따라 내리라고 하면서 그냥 따라오라 하시고는 앞서 휑하니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에 홀려서 귀신에게 홀리듯이 아무 저항없이 터벅터벅 따라갔습니다. 밑져봐야 본전이고 이왕지사 던져버린 몸뚱아리 뭐 큰 대수겠냐 싶었습니다. 상남면 사파정동(나중에 지명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상남면이 저희 아버님 고향이시고, 저희 선산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묘한 운명같은 느낌이 옵니다.) 시골 논길을 한참 걸어가니 꼭 전설속에 나오는 초가집이 한 채가 나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라 하시면서 이끄는 모습과 포스가 제 친할머니 같으시고 정말로 부처상처럼 후덕하게 생기신 모습이 저를 구원하러 일부러 내려오신 분 같았습니다. 집안에는 허름하지만 소여물 끓이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익숙한 향긋한 냄새였습니다(저희 집에서는 아버님이 소를 키워서 달구지를 활용하여 배달을 전문적으로 하셨기에 소와 소여물과는 아주 친숙합니다.) 저에게 뭐가 문제이고 어디가 아픈지를 자세히 묻지도 않으셨는데 제가 늘 지병처럼 가지고 있는 머리 정수리부위에 전기 감전된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 때문에 책도 못보고 잠을 이루지를 못하는 것을 아셨는지, 이 할머님이 정확하게 그 부위를 삼릉침으로 (대학들어와서 그게 삼릉침인 줄 알았습니다.) 찔러서는 피를 철철 흘리게 사혈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냥 담담하게 몸을 맡겨버렸습니다. 한참을 시술하고서는 까만 환약을 한 포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주동안 매일 오라고 지시를 내리고는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무릎을 탁 치시면서 왜 미처 그 분을 몰랐을까 하시면서 예전부터 알고계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저희 집이 진해로 이사오기 전에 저희 아버지 고향이신 상남면, 즉 저의 본적인 곳에 살았는데, 그 지역에 이국선생이라는 약사보살이라 하여 치유능력을 신내림 받으신 분이 바로 그 분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진작 그 분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며 내일 당장 인사드리러 가야겠다고 하시면서 몹시 희망적인 얼굴로 이제는 되었다고 몇 번이나 되뇌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너가 우연히 그 분을 만났냐고 너무나 신기해하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이라 표현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무언지 모르지만 어떤 기운이 감도는 전율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제 인생의 기사회생을 맛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비로소 느꼈습니다. 그 날 저는 너무 희망적이어서 그런지 아님 치료의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습니다. 그 날의 그 잠은 아마도 평생 잊지못할 숙면이었습니다. 드디어, 회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근 1년여 넘게 치료해도 낫지 않던 불면증과 우울증이 단 2 주만에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고, 저에게 운명적으로 두 번째 한의학을 경험하게 해주었으며, 몸과 마음을 동시에 치료시켜준 이 의학이 저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으며, 무엇인가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것들이 요즘 제가 몸과 마음의 신경정신고 영역의 난치성 질환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게끔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인식하고, 혹여 죄를 짓거나 궤도를 벗어나면 철퇴를 치는 것을 느낄 때, 이것은 나만의 감상이라고 느끼기에는 운명적인 요소들이 다분히 많습니다.) 이 길로 가지 않으면 끝까지 병마의 고통을 주어서 어찌되었던 이 길로 안내해가는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감까지 어렴풋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는 어떤 방법으로 이 길을 가야하는지 실마리조차 찾을 수가 없었고, 그냥 단순히 나에게 접근해주었던 두 번의 한의학치료가 신비하게만 간직되는 추억 같았습니다. 그 때가 77년 한해가 저무는 12월 말이었습니다. 이제사 한해가 저물고 78년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겠구나 싶어 희망에 부푼 날들이었습니다.

 드디어 대망의 1978년 봄이 왔습니다. 제 인생에서 희망의 싹이 트는 한 해였습니다. 아직도 몸과 마음이 완전치는 않지만 무언가를 시도는 해볼 수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학공부는 엄두도 못 내고 제 생활고를 해결하면서 예술성을 살릴 수 있는 (저는 사실은 화가를 한 때 꿈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초등시절 사생대회마다 전국대상도 받은 적이 많고 그림에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진기술을 배워야 겠다는 계획으로 부산누나집에서 학원을 등록하였습니다. (제 인생에 영향을 끼친 세 여인을 꼽으라면 어머님, 작은 누님, 그리고 현재 제 아내라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작은 누님은 자상하고, 늘 저를 다소곳이 챙겨주시는 포근한 분이십니다.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1978년 3월 2일이었습니다. 1978년은 한 해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워낙 의미있는 변화가 너무 많아서 날짜를 정확하게 다 기억하고 숫자에 큰 의미부여가 되는 한 해라 잊지못할 숫자들이 자주 등장 할 것입니다. 사진학원을 등록하러가니 사진사도 필기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책을 한권 주었습니다.
 받아들고서 조심스럽게 책을 오래간만에 글을 읽고 외워보니 머리가 아프지 않고 견딜 만 했습니다. 이렇다면 좀 더 욕심내서 “내친김에 검정고시를 도전해봐? 그래 죽기살기로 한번 도전해보자, 내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살았는데 설마 죽지는 않겠지.”라는 자신감이 나도 모르게 생긴 것입니다. 하느님이 분명 죽지않게 해서 무언가를 필히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게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암시같은 것을 느낀 것입니다.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자신감이 어느덧 생긴 것입니다. 다음날 바로, 3월3일 부산 서면에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러 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78년도가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검정고시를 정부 주관하에 통합해서 문교부에서 첫 시행하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정보에 의하면 평이하게 출제가 될 것이라고 학원측에서 귀뜸을 해주었습니다. 시험은 일 년에 4월15일, 8월15일 두 번이었습니다. 교재를 받아와서 보니 3년은 쉬었지만 2학년 말까지 그래도 우수하게 공부한 터라 문제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습니다. 은근히 욕심도 나고 해볼만 했지만 한번 쓰러진 트라우마가 있어서 조심스럽게 조금씩 욕심내지말고 천천히 하자란 마음으로 첫 수업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학교수업을 받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저는 검정고시 공부, 삼수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행복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흔하지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 모두들 부끄러워하면서 패배자처럼 공부하는거죠. 저는 투병생활 3년 동안에도 꿈에서도 학교가서 공부하고 놀던 꿈을 꾸다가 눈을 뜨면 현실은 중학교 졸업생으로 처져 있는 제 모습에 아침부터 얼마나 허망하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8월15일 목표로 검정고시 학원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를 들어보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큰 문제가 없어보일 정도로 평이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정도면 가능성이 충분하리라 판단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저의 가장 큰 취약과목인 수학이었습니다. 합격점이 평균 60점이고 한 과목에 40점 이하면 과락으로 인정되어 다음에 그 과목만 다시 시험을 쳐야만 하는 제도라 한 과목만 과락해도 전체적인 인생 스케쥴이 딜레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4월15일, 검정고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한지 42일만에 경향성을 파악하기 위해 시험을 한 번 쳐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결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기적적으로 수학이 40점. 과락 커트라인에 걸려서 1문제만 더 틀려서도 꼬이기 시작했을 텐데, 어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가 있는지 저는 너무 경이로움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드디어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꿈에 그리던 대학을 들어갈 수 있다는 벅찬 마음에 합격증을 들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또 어머님께 달려갔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어머님에게 기쁨을 줄 수가 있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수학40점! 저는 그 순간 많은 다짐을 했습니다. 하느님이 분명히 저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계획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오만하지 말라고 수학 40점의 장치까지 치밀하게 준비를 해두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기사회생을 시키는 것으로 전 확신을 가졌습니다. 수학40점이 던져주는 인생메세지는 이후의 인생에서 저를 겸허하게 살라는 강력한 주문 같았습니다. 저는 그 합격증을 가슴에 품고서 참된 삶과 겸허하게 살아 가리라 그리고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참된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왕 내친김에 올 한해로 마무리를 짓자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거침없는 하이킥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대학진학까지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78년도까지 대학을 가지 않으면 군대를 가야하는 상황이 전개되어 또 어떻게 꼬일지 모르니 과감히 도전을 결심했습니다. 부산학원에서 소위 말하는 삼수 아닌 삼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패배자의 분위기가 아니고 진군하는 승리자의 위용으로 삼수생활을 너무나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긴 터널을 뚫고서 제가 강의실에서 대학이란 곳을 목표로 공부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꿈에서만 그리던 공부하는 제 모습이 신기하게도 느껴졌습니다. 수업 중에 하늘만 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학원 근처에서 먹는 라면의 그 달콤함,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워낙 약하니 어머님께서 보신탕을 자주 사먹으라고 늘 걱정과 우려로 조마조마하게  당부를 하던 그런 근심은 행복한 근심이었습니다. 미래가 보이는 희망찬 나날이었습니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디든 대학만 들어가도 저는 만족하지만, 그래도 제 상황을 고려하며 곰곰이 더듬어보니, 태생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항상 저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내 몸을 평생 온전하게 유지하면서, 어릴적부터 시작해서 투병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해 준 두 번의 소중한 한의학의 신비한 체험, 그리고 무엇보다 투병 생활 중에 늘 가슴속에 되뇌이며 간절하게 기도하고 하느님에게 만인을 구제하고 만인에게 행복을 주고 도움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답은 자연스레 도출되었습니다. “그래 나도 치료하고 남을 치료하는 삶을 살아보자.” 전혀 나와는 별개의 세상이었던 예상치 못한 한의학의 진로를 모색했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의대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경희대와 원광대, 그 당시는 예비고사와 학교에서 직접 출제하는 본고사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경희대는 그 어려운 수2를, 다행히 원광대는 수1을, 당연히 원광대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예비고사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267(?)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3년 휴학 후 8개월 공부한 것치고는 무난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본고사 국어75점 만점에 만점, 영어도 만점 그러나 역시 수학 75점 만점에 25점. 거의 떨어졌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제 행운의 여신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포기하고, 전 곧바로 의료계 근처에서 머물러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한풀 꺾인 상태로 바로 대구영남보건전문대학과 성남에 위치한 신구보건전문대학의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에 지원을 위해 원서접수를 하였습니다. 일찌감치 원광대 한의대는 포기하고서...(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직업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라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수학 한 문제로 인생이 갈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이 부분을 가슴에 새기면서 늘 아랫사람들에게 소중하게 다가가고자 합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표장을 찾았습니다. 조마조마하게 게시판을 훑어내려갔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수험번호는 생각이 안 나지만 제 이름 석자 ‘노영범’이 합격자 명단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전 너무나 기뻐서 그 자주하던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기절의 종류가 다른 것이지만,,, (이런 환희에 찬 기절을 자주해보았으면 하지만, 이제 자주 오지 않더라구요.) 원광대 본관 언덕에서 얼마나 뒹굴었던지 온 몸에 잔디 지푸라기와 잔설이 덕지덕지 붙은 상태로 원광대 교정에서 시내까지 달려가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야호를 외치며 맨 먼저 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초조히 기다리시는, 떨어지면 낙담할까봐 노심초사 하시는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작은 누나, 그리고 우리 형님들께 전화를 불이나게 돌렸습니다. “엄마, 나 붙었어, 합격했어. 나 드디어 해냈어” 저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광명의 날이 왔습니다. 새 세상이 열렸습니다. 저에게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도 못했습니다. 바로 저는 버스를 타고 저의 고향 진해로 달려갔습니다. 늦게 집에 도착하니 아버님이 술상을 딱 차려놓으시고는 고맙다, 고맙다를 연발하시면서 막걸리를 드시면서 흥에 겨워 저를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시고 했습니다. 이제 너가 한약방(?)을 차리면 내가 작두로 약재를 썰어주겠다고 흥분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제가 대학입학 후 3개월도 채안 지나서 1979년 6월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한의사가 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제 인생과 맞바꾸고 가신 것 같아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호강도 못 시켜드리고 가슴만 졸이시다가 가셨습니다. 부친상을 당하고 삶을 다시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옆에서 어머님은 눈물만 흘리고 계셨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힘들어서 또한 너무나 기뻐서 흘리는 복잡한 눈물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렇게 제 인생의 악몽은 종지부를 찍고, 희망찬 새 시대가 열립니다. 아마도 확신하건대 원광대 한의대에 꼴찌로 합격했다고 거의 심증이 갑니다.

 제 인생의 황금기인 대학시절의 기쁨과 낭만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은 생략하고 이제 학문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한의학은 어쩌면 저에게는 생명같은 존재입니다. 대학시절 내내 한의학에 대한 저의 진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은 회복되어도 항상 불안하고 체력은 그리 강건하지 못해서 또한 혹시나 예전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투병생활 때 몸에 배었던 규칙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대학시절 내내 지켰습니다. 하숙집 어느 동료가 어느날 거의 청교도 생활이라고 나중에 제가 신부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고 할 정도이니 상상이 가시죠. 술, 담배는 일절 못했고, 체력이 딸려서 몰아서 공부를 못하니 하루하루 복습으로 메꾸어나가고 밤 10시에 무조건 취침, 아침에 일어나 배산(익산 원광대 근처 야산)을 한바퀴 돌고 아침먹고 학교에 가고 돌아오는 주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동아리 서클은 엄두도 못내고 방학되면 바로 고향집으로 달려가서 몸을 추스르고 하는 생활을 반복해서 유지를 할 정도였습니다. 조금만 과로하면 쉽게 지쳐버리고, 조금만 환경이 달라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고질적인 체력의 한계는 늘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시절부터 먹기 시작한 한약을 근 30년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먹은 셈입니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조금씩 건강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청교도 생활은 조금씩 흐트러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보면 대학생의 생활치고는 건전하고 매우 진지한 대학 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한의학은 기나긴 시련의 연속 끝에 주어진 운명같은 존재였습니다. 한의대를 들어오기 전에 저는 폐결핵이라는 전염성 질환을 양방으로 치료한 경험이 있고,두 번의 한의학적인 방법으로 소아마비를 치료하고 또한 불면증과 우울증을 치료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제 몸을 통하여 양방, 한방, 그리고 몸과 심지어 마음까지 치료를 체득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것은 제가 앞으로의 방향타를 결정하는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의대가 저에게 너무나 값지고 소중하게 주어져서 전폭적으로 몰입을 하였고, 예전에 저에게 치료의 경험을 했던 것을 암호문자 해독하듯이 샅샅이 추적하고 공부하고 집념과 열정을 가지고 임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던 저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지켜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멋있게 보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한의대만 가면 궁금했던 비밀들이 백일하에 밝혀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가도 오리무중이고 해답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하는데도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고 정답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갈수록  초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패턴으로 인체를 완전하게 치료할수 있을까? 치료의학이라고 자부하고 의학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그런 과정에도 저에게는 인상깊은 강의가 있었습니다. 저의 은사이신 강순수 교수님의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 의학을 조망하는 식견, 양의학의 장점과 한의학의 장점과 한계성, 한의학의 장점은 다름아닌 처방, 방제학에 숨어있다는 내용에 감명을 받고서 방제학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방제학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학교에서 배운대로 임상에 임하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이제 한의사로서 청운의 꿈을 안고, 보랏빛 꿈을 안고서 사회의 첫발을 디디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청년한의사가 시베리아 벌판에 이제 던져진 것입니다.

 1986년 봄, 사회에서의 첫 시작은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관리한의사로 근무할 곳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흡사 노예시장 같은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참혹할까요. 어쨌든 종로 어두컴컴한 다방에서 소개해주는 브로커가 저를 보고 키크고, 인상 좋고, 이미지 좋고, 허우대 멀쩡하니 실력보다 상품으로 평가해서 최상급을 받았습니다. 월 80만원에 낙찰되어 낯선 성남으로 팔려갔습니다(?). 사회논리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인물이라서 그저 세상을 원칙대로 착하게만 살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첫 근무지에서 저는 허수아비였고 사장이라는 작자가 저 몰래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저는 더럽고 불명예스럽게 오래 사는 것보다 깨끗하게 짧게 살자는 주의라 상의없이 과감히 폐업신고를 하고 던져버리고 나왔습니다. 3개월만에 실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사회의 첫 발을 쓴 잔으로 마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지금의 아내와 열렬히 사랑을 나눌 때였습니다. 하루도 목소리를 안 들으면 미칠 것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매일 전화하고 보고싶다고 호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 마음을 정확하게 대변해주는 노래는 홍서범의 “가난한 연인들의 기도”입니다. 한번 들어보시라. 별님이시여..햇님이시여..달님이시여...간절한 연인들의 기도입니다.가슴 절절한 노래입니다.

 이왕 저희 아내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만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제가 이 인생스토리를 하게 된 배경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인생 초반에 저는 첫사랑, 두번째 사랑이 모두 어린나이에 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사랑은 가수로도 데뷔했는데 제가 예비고사 치르기 하루 전 소집일에 유방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예비고사를 뜬눈으로 지새우고 겨우 시험을 쳤습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두번째 사랑도 대학교 2학년인가 어떤 연유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여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트라우마가 참 많죠. 그래도 버티고 있는 것 보면 한약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약으로 버티고 있는 거죠.) 생겨서 대학시절 내내 독신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내가 만나는 여자마다 사랑하면 죽는구나 하는 징크스에 걸려서 혼자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아내는 제 친구의 동생의 친구로 그냥 오빠 동생으로 알고 지낸지 5년여가 되었을 때입니다. 자연스레 방학 때 고향에 내려오면 우연으로 가장해서 만나고 차도 마시고 부산태종대에도 놀러가고 마산 뒷골목에 냄비우동도 자주 먹으러 가면서 연인도 아니고 오빠동생도 아닌 애매하고 어정쩡한 관계가 끊기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갔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선을 그어놓고 감성적으로는 자꾸만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른 여자들을 만나보아도 제 아내 박미경의 얼굴만 오버랩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싱그러운 미소, 환하게 웃는 얼굴, 시원시원한 심성 거기다가 지적이고 우아한 자태까지.... 그야말로 제 여자로써는 손색이 없는 최상의 여인이었습니다. 제 아내도 저를 싫어하지도 않았고(아이러니 하게도 제 아내는 제가 재밌고 잘 놀 것 같아서 결혼을 결심 했답니다. 그런데 결혼 후 매일 공부하고 매일 대외 활동만 하니 속아서 결혼 잘 못했다고 종종 입버릇처럼 장난스레 이야기하곤 합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랑의 감정이 생기고, 감정에 승복하여 결혼까지도 욕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징크스를 극복하고서는 1985년에서 1986년까지 약 1년에 걸쳐서 정식 연인으로 사귀기를 합의(?)하고서 본격적으로 원없는 열애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제 인생의 찬란한 봄이었습니다. 저는 색감에 민감해서 연애시절에 제 아내가 입었던 옷 색깔을 다 기억합니다.흰 하이힐 구두에 짧은 청치마에 빨간 티셔츠, 아디다스 운동화에 청바지와 횐색 파란색이 조합된 점퍼, 청바지에 나비같은 흰 블라우스.....꼭 천사 같았습니다. 어쨌든 전 평생 사랑다운 사랑을 못할 줄 알았는데 박미경 덕분에 정말 원없이 가슴깊이 진심으로 처음으로 사랑하였고 결혼까지 골인을 했습니다(결혼 초에 식사 후 갑자기 구토를 심하게 하기에 덜컹 겁이나서 또 징크스에 걸리는게 아닌가 하고 밤새 노심초사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고, 미래가 불투명한 한의사라는 직업에도 망설이지도 않고 보잘 것 없는 저를 순수하게 나만 바라보고 나만 좋아서 결혼까지 해주려는 아내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당시 저희 아내는 유망한 직종인 검사, 의사, 국회의원 등에게 청혼이 많았습니다.) 제 아내감으로는 최상으로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여인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마음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 아내는 아름다운 미모에 착하기도 해서, 저에게 결혼준비금을 부모님에게 빌려서 개원을 하자고 위로 겸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부모님이나 누구에게도 공짜로 신세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워낙 돌파구가 없으니 저도 염치불구하고 찿아뵙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를 탐탁찮아 하시는 예비 장인장모께서 심지어 결혼비용을 좀 빌려달라고 하니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셨을 겁니다. 결혼 지참금을 들고와서 딸을 데려가도 시원찮을 판에 돈을 내어달라하니 암담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례하기도 하고 딸 가진 부모에게 몹쓸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겁도 없고 세상물정을 몰랐던 시절입니다. (장모님은 그 때 그 이후로 화병이 걸리셨는지 그렇게 애지중지 사랑했던 딸을 두고 결혼 후 7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원인제공을 한 장본인이라는 생각도 많이 하고 자책도 됩니다. 이 이후로 아내는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허망해하고 무척 외로워하고 고독해했습니다. 저도 따뜻하게 못해줘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어찌되었던 처갓집에서 일부, 작은누나일부, 현재 사무장으로 계시는 바로 위  형님이 십시일반해서 우여곡절 끝에 개업을 86년 9월6일, 결혼식은 그 해 10월19일 하게 되었습니다. 개원 준비로 결혼식은 뒷전으로 밀려서 간소하게 대충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 대목에서 너무나 제가 이기적이라 여자에게는 소중하고 한번밖에 없는 그 화려한 결혼예물과 신혼여행도 없이 그냥 우리 둘만 같은 공간에만 있으면 좋다고 하여 그렇게 제가 쉽게 생각했는데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아내에게 늘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성공에 너무 집착하여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전반에 투병생활의 악몽이라는 그림자가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많이 지배하는 악습이 있다는 것을 요즘 뒤늦게 느끼고 참회하고 반성도 합니다. 그 후 신혼부터 아내는 한 번도 마음의 변함없이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진심으로 저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저는 신혼 초부터 한의학에 미쳐서 또한 욕망에 눈이 멀어서 아내나 가정보다 공부배우고 강의하고 학회 할동하고 대외적인 시간이 많아지면서 점점 아내에게 소홀해지고 시간 할애를 못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탐욕에 눈이 멀어서 앞으로만 전진하다가 정작 소중한 제 아내의 가슴에 멍에를 안겨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아내가 요즘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슴에 멍울이 지고 저에 대한 섭섭함, 실망감에 우울해합니다. 제가 너무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아내를 보살피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제 보살핌없이 순전히 엄마의 정성으로 훌륭하게 커준 두 아들에게 모범적인 아버지로, 아내에게 가슴따뜻한 남편으로, 가정에 충실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랑했고 앞으로도 마지막 사랑을 할 제 아내가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애할 때 가슴깊이 다가왔던 가난한 연인들의 기도처럼 살고싶고, 신혼시절 꿈꾸었던 보랏빛 무지개를 그렸던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제가 초심을 많이 잃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많이 느꼈습니다. 참회하며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986년 9월 6일 개원을 하였고, 저는 임상을 정밀하게 학교에서 배운대로 실전에 적용했지만 제가 기대할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임상에서 그런대로 성공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실력보다는 일단 운이 좋았고, 그 당시 사회분위기가 88올림픽으로 인해 경제가 부흥했고, 여유가 넘치니 웰빙에 관심이 많아져서 한의원의 전성기였다고 평가가 됩니다. 한마디로 때를 잘 만난 것뿐이였죠. 운영상 문제가 없고 승승장구하는 한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문적으로는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임상에서 환자를 진료함에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환자가 고통에서 치료되어 행복감을 줄 수 있는 한의학적 방법은 없는가? 끊임없이 모색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데 온 열정을 쏟았습니다. 처방이라는 처방은 두루 섭렵을 하였고 당대 명의들의 처방도 물색을 다 하였습니다. 후세방, 사상방, 고방 가릴 것 없이 탐구하고 적용해갔습니다. 그 당시로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던 것이 환자에게 적용하면 또다시 한계가 오고 벽에 부딪치고 하여 번민과 갈등으로 전전긍긍 하였습니다. 임상방제학강좌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질병을 완전하게 고치면서 인체를 정상화시켜주는 한의학이 나의 목표이고 그 끝을 보고 싶은 열정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황한의학으로 대표되는 절충파인 대총경절, 시수도명 등의 책을 접하면서 傷寒論 고방에 매력을 느끼고 이전보다 향상된 치료율과 명쾌함이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또 다시 고방의 탐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책을 보다보니 腹診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나름 腹診에 대한 정리와 임상에서 적용한바 상당히 유의성을 나타내어 저의 트레이드 마크로 할 요량으로 정리에 정리를 거듭하였습니다. 무언가 조그마한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10년간 동국대에서 임상방제학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진행하여 왔습니다. 腹診과 방제학의 제목으로 고방을 腹診으로 풀어내는 강의를 진행하던 차에 학생 한 명이 교수님과 똑같이 腹診을 중요시하는 분이 계시는데 심선택 선생이라 일러주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연락을 취해봐야지 하고서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진료실로 젊은 분이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넙죽 절을 하고서는 자기는 심선택 선생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임종 시에 당신의 임상기록물을 노영범 선생에게 전해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꼭 제 손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면 좋겠다고 하여 저는 그 결과물을 면밀히 살펴보니 의료현실이 열악할 당시 제천에서 腹診과 고방을 운용한 많은 치험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기록해 놓은것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소중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오랫동안 그 자료물과 제 임상경험을 덧붙여서 임상에 적용하여 유의한 결과를 도출한 것만 정리하여 <腹診과 정통방제학> 이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서문에도 언급을 하였지만 한국한의학계에 처음으로 腹診이라는 화두를 던진 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래도 현재 대한상한금궤의학회의 단초가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동국대 강의를 진행하는 10년 동안 자그마한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말하듯이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한다’ 는 주의입니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한의학의 역사를 이루려면 저 혼자의 힘보다 함께 모여서 衆志를 모아서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1년에 10명만 인재를 키워서 100명의 드림팀이 구성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가정하고서, 미래의학연구소, 방제원리연구회라는 학술연구회를 (복치의학회 전신) 조직하여 10년을 활동하였지만 소기의 목적도 달성 못하고 흐지부지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임상 13년차 되는 1998년도에 완전한 의학의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일념하에  처방 외에도 다각적으로 모색을 하여 한·양방협진이라는 획기적인 모델을 구축하고싶어서 저의 전 재산을 투입하여 매머드 협진병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양방은 진단과 뇌신경이 장점이고, 한의학은 한약이라는 치료측면에서 결합이 된다면 이상적인 의학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6층 빌딩에 양방방사선과, 양방신경내과 전문의 2분, 한의사 5명으로 의료진을 구성하여 야심차게 출범을 했지만 관점의 차이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서 실패를 인정하고 저의 원래 성격상 고민은 오래하나 한번 결정되면 추진력 있게 결단을 내리는 스타일이고 추하게 오래가느니 비록 나에게 불이익이 있더라도 깨끗하게 살고 싶어하는 성품이라 많은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급매로 털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 때 제 인생을 찬찬히 살펴보니 대형화된 병원을 꾸리면서 인생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조종하면서 가야하는데 인생이 나를 끌고 가는 형국이라는 판단이 되어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그 기점이 사실 오늘날 대한상한금궤의학회가 탄생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경영자가 아니고 학자로써 한의학에 매진하는 게 저의 적성에 맞다는 판단에 용단을 내리고서는 만 7년 만에 공중분해 시키고 현재의 노영범 부천한의원이라는 자그마한 테마건물로 아름답게 임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생을 다시한 번 궤도수정을 꾀했던 것은 한의학을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결론을 내린 결과였습니다. 한·양방협진모델도, 10년간의 방제원리연구회도 실패를 겪으면서, 그로인한 많은 손실과 정신적인 황량함을 느끼고 다시한 번 추스르고 조용하게 반추하여 원점부터 시작하여 처방의 완성을 이루고, 임상의 최고의 치료율을 자랑하고, 객관적인 한의학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각오로 임상하면서 공부하고 책을 저술하여 그리하여 초심으로 돌아가자 하여 나온 결과물이 <腹診과 정통방제학>입니다.

 책이 나오고 난 후 강의요청이 쇄도하였습니다. 腹診이라는 것이 생소하고 특이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 동안 저는 한의사 대상으로는 강의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보다 다양한 정보들을 가진 상태의 한의사보다는 백지상태의 말끔한 머리에 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이상적이고 효율적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의사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가 되었다고 제자들이 종용을 하여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범적으로 주변에 가깝게 지냈던 제자와 동료 중심으로 소규모로 시작하여 반응들이 호의적이라 전국적으로 확대를 시켜서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강의를 들었던 친구들이 노의준, 이성준, 이상윤 등  학회 초창기 핵심 멤버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 학회도 이루어지기가 힘들었습니다.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강의를 들었던 번득이는 젊은 친구들이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 하여 腹診과 관련된 책자를 검색하다보니 일본의 길익동동이 腹診의 대가이며, 藥徵이란 책이 傷寒論 금궤요락의 처방들을 약물로써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을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판도라 상자를 열듯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분석 후 격렬한 토론을 거쳐 임상에 적용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파고들수록 예전에 보지 못한 독특한 방식에 傷寒論을 해독한 것이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우리들은 흥분하였고 이런 정보를 공유하고 단체로 구성하면 좋겠다는 공통된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회장을 맡아달라고 하여 저는 또 다른 공명심에 우를 범할까 우려가 되었으나 명예직으로 맡아주면 젊은 자기들이 실무를 도맡아하겠다고 하여 승낙을 하고서 드디어 2006년 8월26일 복치의학회라는 공식단체로 출범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 한의학에 도화선이 될 불을 지폈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저는 어찌되었던 제 생명과도 같은 한의학을 시작할 때의 그 초심에서 비롯된 집념과 열정의 산물이라 생각하고 한의학의 불씨를 놓치지 않은 저의 인생의 힘이라 여깁니다.

 막상 출범을 하고보니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저도 이왕 맡은 이상 제대로 완벽하게 성장시켜야한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초창기 때 腹診과 藥徵으로 질병을 분석하여 수학공식처럼 처방이 도출되면서 이전의 어떤 방식보다도 傷寒論을 운용함에 획기적이고 임상에서 치료율이 상승하고 치험례가 속출하면서 개가를 올리고서는 학회 전체분위기가 고조되어서 정제되지 않은 발언과 감성에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여 잡음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한국한의학에서 傷寒論을 연구하는 공식적인 단체가 결성되었고, 또한 傷寒論을 임상에서 실용적으로 활용하게끔 매뉴얼을 제공하여 傷寒論을 치료측면에서 접근하였다는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가 있습니다. 복치의학회는 대한한의학회의 정식학회가 됨으로써 정통성도 부여받았고 초창기 때부터 각고의 노력을 경주한 82명의 역대 임원진과 이사진들의 눈물겨운 연구와 활동으로 많은 한의사 여러분과 정보를 공유하며 면모를 갖추는 학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학회 초창기 때 이루었던 성과는 절대 무시할 수가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학회의 활동에 중요한 초석이 되라 확신합니다. 역사는 역사입니다. 잘못된 역사이든 잘 된 역사이든 역사는 역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역사의 밑그림이 없이 과연 현재의 학회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역사를 인정하고 그 역사위에 우리는 또 다른 역사를 쌓아가야 합니다.

 제가 회장으로 봉직하는 만 6여년 동안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격렬한 토론도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회의도 무수히 해보면서 한의계를 포함해서 우리 사회에 병폐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논쟁거리에서 남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상대방이 어떠한 행동과 발언을 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명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여유가 부족하다는 것을 종종 느꼈습니다. 나와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하나로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할 여지도 없이 즉각적으로 감정적으로 대항하는 모습들이 몹시 못마땅한 풍토입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인지를 확인조차도 하지 않고서 인신 공격처럼 감정폭발만 터트리고는 문제의 본질은 호도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겁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면 우리가 챙겨야할 실리와 명분 모두가 잃게 됩니다. 이런 현상들이 한의계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을 개탄스럽게 생각하고, 한의계가 발전하지 못하는 요인 중에 하나라고 판단이 됩니다. 이런 마인드로는 학회가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풍토가 존재하는 한 한의계는 한 발자국도 학문적으로 완성을 이루기가 힘듭니다. 대한상한금궤의학회는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집단이 아니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순수학술단체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매사에 정치논리와 파워게임을 자행한다면 모처럼 한의계에 훌륭한 학술단체를 조성하고서 또 한 번 불투명하고 암담한 미래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한 점을 향해서 나아가도 도달하기 힘든 과정인데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우리의 열정을 식힐 수는 없습니다. 사사로움보다는 공공의 선에 다가가도록 진지하게 토론하는 광경이 아쉽습니다. 우리 학회가 마치 임상대가를 길러 내어서 배틀하는 자리입니까? 누가 누가 임상을 잘하는가 자랑삼아 경쟁만 하는 학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한의원에서 임상의 개가를 올리는 것은 당연하고, 그 치료에만 만족하여 오만함과 독선을 부린다면 한국한의학은 변방에서 머물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이런 위기의식없이 얄팍하고 비생산적인 논쟁만 일삼으면 또다시 한국한의학은 영원히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목표로 달려가야 합니다. 세계에서 더 인정받는 한국한의학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두가 “네 덕, 내 탓”이라는 미덕을 발휘해 주면 좋겠습니다. 한의학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간 노영범이 한의계 전체에 마지막 으로 던지는 진언입니다. 여기서 멈출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만연되어있는 유문화의 잔재를 철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을 통일하고 세계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한상한금궤의학회의 꿈은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가슴깊이 새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간절함입니다.

 학문은 언제든지 진화하고 진보되어야합니다. 학회는 생물이라 끊임없이 살아 움직여야하고, 어제의 학문보다 더 나은 상위개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접목시켜가야 합니다. 하나의 학문이론이 고수되어 간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고 종교일 뿐입니다. 왜 변화에 두려움을 가지십니까? 자기 틀을 깨고 변모하여도 이전의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 것은 보석처럼 찬란하게 새롭게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끊임없이 스스로 부정하고 양심고백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를 부정하고 부정하고 해서 정반합의 진리에 가까운 학문을 찾아야하는 것이 학문의 속성입니다. 이전보다 우수한 腹診과 藥徵을 통한 개념으로 우리는 적극 도입하여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진료패턴으로 세팅하여 그동안의 임상과 논문을 통하여 입증시켜가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틀을 깬다고 해서 전면 폐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부분은 기초로 언제든지 토대가 되어서 탑을 쌓듯이 한 단계 한 단계 진화되어 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늘 그랬듯이 완전불변의 법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진리에 가깝게 찾아가는 것이 학문이라 여깁니다. 이 패턴으로 임상에 임해보고 난관과 문제점이 노출되고 완전하지 못하다면 상위개념을 도입하고 접목시켜서 진화시켜가야 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2, 3년 전부터 한의계에 반드시 필요한 신경정신과를 특화시켜서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습니다. 난이도가 높은 질환의 환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존의 腹診과 藥徵으로 접근하여 성과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벽에 부딪히게 되고 난관에 봉착하는 사례들이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자는 만족할 만큼 완치가 되는 사례가 많기도 하지만 10명에 7, 8명이 치료가 되어도 2, 3명이 치료가 안 되는 것에 저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임상이 행복하지 못하고 환자에게도 행복감을 주지 못하면서 우울한 마음까지 들곤 했습니다. 신경정신과 환자를 보면서 최적의 처방을 찾는 데만 급급하고 있고, 진정한 의사의 모델인 환자의 영혼을 다스려주는 의사가 되고 싶은 것이 제 꿈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저는 최고의 의사는 환자에게 내 마음으로 다가가 그 환자의 영혼을 다스려 주면서 여유롭게 그 환자의 인생과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서 상담도 해주고 공감도 해주고 티칭도 해주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의사이고 저는 이 일념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한 것이 최근의 저의 임상세계였습니다.

 대한상한금궤의학에 대한 저의 비젼과 일부 회원 한의사와는 약간의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조금 느꼈습니다. 저는 이 학회를 통하여 저를 포함해서 傷寒論을 통한 한의학이 임상에서나 개인의 삶에서 일단은 행복한 대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 한의학에서 임상적으로 표준화된 일반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한의사 여러분이 편하고 쉽게 임상에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서는 여러분의 손을 거쳐가는 환자분들이 모두다 몸과 마음이 안정화되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한의학으로 정통성을 인정받아서 한국도 행복한 한의학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국 한의학이 논문으로 형성되어서 미국을 위시한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는 그런 한의학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젼이 실현되려면 저는 인재와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금년 4대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학술TF팀의 구성이었습니다. 학회는 이제 한 개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움직여서도 안됩니다.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강력한 파워가 생깁니다. 아이디어에 유달리 뛰어난 이성준 원장을 팀장으로 하고, 비젼과 기획에 최고의 인재인 임재은 이사를 간사로 임명하여, 12명의 기획요원을 자진지원 엄격히 심사 발탁하여 매 주일 마다 기획전략 회의와 연구를 진행하여 교육, 정책, 학술로 3파트를 나누어서 학회의 모든 기획과 비젼을 정리하는 학회의 드림팀이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매 주 보고도 받고 모니터도 합니다. 모니터를 하면서 저는 너무 감동받아서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순수한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내가 꿈꾸던 것을 이 드림팀에서 구현해주겠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젊은 친구들이 한국 한의학을 만들자고 열정을 뿜는데 저 같은 원로는 판을 깔아주고 건너갈 수 있게 디딤돌만 놓아주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들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이제 도약할 수 있는 디딤돌은 다져놓은 것 같습니다.

 1년여 작업을 거쳐서 12월말에 1차 결과물을 여러 회원들에게 공유하고자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六經辨證도 이러한 TF팀의 노력의 결과물의 한 부분입니다. 저번 이사진 회의 시에 보고를 하였고 공유했던 부분입니다. 아쉬운 것은 많은 이사진 여러분이 불참을 해서 아쉬웠지만, 제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란 기존의 藥徵을 전면 폐지하고 전면 부정하는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초석으로 깔고서 진화된 진료패턴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藥徵은 길익동동 선생이 傷寒論을 해석하는, 특히 약물로 풀어가는 길익동동 선생 개인의 특수한 방법입니다. 傷寒論을 읽어내는 방법 중에 그래도 가장 우수한 수단과방법이라 인정합니다. 상한금궤의 처방에 포함되어 있는 약물을 이해하고 처방의 약물구성을 어느 정도 인지해야만 그래도 처방의 특질을 감지할 수가 있다는 차원에서 기초적으로 섭렵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교육이 이루어지고 기초과목으로써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최초의 모태는 張仲景 선생의 傷寒論입니다. 1700년여전에  張仲景 선생이 진료했던 원형 그대로 이 시대에서 진료를 재현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길익동동의 藥徵도 그런 일환으로 탐구했던 독특한 방법과 수단이었습니다. 六經辨證은 그런 관점에서 유의성을 부여할 수가 있습니다. 張仲景선생이 六經辨證으로 환자가 평소에 병에 대항하는 상황을 인식하여 6개의 카테고리를 나누고, 그 하나의 카테고리에서 환자의 상태와 일치한 조문을 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 및 인식을 하면서 현대의학적인 개념을 접목시켜 이해하고, 압축된 처방의 구성약물을 藥徵의 개념으로 크로스체크를 한다면 임상이 심플하면서도 완벽성을 기할 수가 있다는 진일보된 진료패턴을 학회차원에서 제공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傷寒論에서 잡히지 않으면 금궤요략으로 넘어가서 다시 물색을 하면 상한금궤를 용이하게 접근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문을 작성하고, 학문적으로 성장을 하려면 정확한 근거와 진단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傷寒論은 정확한 진단기준과 근거가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현대인은 너무나 성급합니다. 원래 이 개념으로 절차를 밟아서 순차적으로 내년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려고 하였으나 강의를 수강했던 원장들이 깊은 공감에 못 이겨 증례보고가 되다 보니 학회가 아무런 개념없이, 절차없이 아마추어적으로 꾸려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점은 불찰이 있었던 것을 양해 바랍니다. 회원 여러분은 참고하여 체득해보시기를 권유합니다. 학회가 양분되는 느낌으로 우려와 불안을 느끼는 회원들의 얼굴이 걱정스럽습니다. 우려일 뿐입니다, 최선의 방식을 또 찾아갑니다. 이것이 학회이고 학문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다만 진지한 토론을 위한 토론이 되어야지 감정적 대립은 금물입니다. 저는 끊임없이 오늘도 내일도 傷寒論의 원류를 찾아갈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新 傷寒論을 재현시키고, 새로운 한의학을 창조할 것입니다. 저도 이제 한의학을 처음 시작할때의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저도 傷寒論의 본류를 찾는 제 개인의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이 부분은 결과가 나오면 여러분들의 검증을 거치겠습니다.
 
 저는 이 六經辨證을 참고, 도입함으로써 일정부분 막히고 어려웠던 부분들이 해소되고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나 신경정신과 환자는 복잡다단하고 횡설수설하기에 적방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난관에 부딪힌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1년 동안 공황장애로 무수한 약을 사용했으나 진전이 없는 골치 아픈 환자가 있었습니다. 음식만 먹으면 가슴이 답답해오면서 쓰러지려고 하는 환자였는데 六經으로 少陰病으로 분류하고서 條文을 보니 手足逆冷, 煩躁欲死인 吳茱萸湯으로 2주 만에 최초로 안정세를 찾았고, 또 1년간 약을 먹는 간질환자로 橘皮竹茹湯, ?桂味甘湯 등 간질에 잘 듣는 처방을 무수히 사용했지만 이 환자는 유독 효과가 없었습니다. 六經辨證으로 해보니 厥陰病에 脈滑而厥 理有熱 白虎湯으로 3주동안 발작이 없었다고 합니다. 왼쪽 옆구리부위가 15년 동안 아픈 환자는 甘遂半夏湯을 4개월 복용했고 배에 통증은 가셨으나 왼쪽얼굴에서 사타구니까지 부은 느낌이 마무리가 안 되는 환자였는데 六經辨證 太陰病 桂枝加芍藥湯으로 2주만에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환청으로 2년여 동안 치료해도 경과가 미미한 환자에게 太陽病 心中懊?로 진단하여 梔子?湯으로 환청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4개월동안 공황장애로 ?桂味甘湯을 복용했지만 효과는 미미한 환자였는데 六經辨證으로 분류하여 少陰病으로 판명되어 四逆散 복용 2주만에 증상이 호전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이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은 어폐가 있고 무리수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학회로서는 더 나은 진료패턴을 제시하고자 무던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할 나위없이 다행스러운 것은 六經辨證의 카테고리에서 비록 적방이 아니더라도 후유증과 부작용이 엄청나게 줄더라는 겁니다. 이제 시작한지 불과 얼마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연구해 나가야 합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존의 개념보다 더 나은 개념이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도전해야 합니다. 기존의 틀에 대해 잘못된 점이 발견되고 더 나은 개념의 장점이 보인다면 우리는 양심고백을 하더라도 진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저는 오히려 용기있는 모습이라 판단이 됩니다.  저는 요즘 임상이 편하고 행복해졌고, 환자도 행복해졌고, 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습니다. 이 정도라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가 됩니다. 六經辨證으로 카테고리를 정해놓고서 기존의 腹診과 藥徵의 개념으로 처방을 탐색하니 적방에 상당이 접근이 용이하게 최상의 처방이 도출이 된다는 것입니다. 학회 초창기때 적용했던 腹診과 藥徵은 전혀 무용지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학회가 하나를 무너뜨리고 이것이 아니니 다시 다른 패턴으로 가자는 주먹구구식의 학회가 아닙니다. 학문의 연속선상에서 진화되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六經辨證도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또 다시 모색하고 변화시켜갈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3번의 큰 병을 앓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 세 번이 폐결핵, 요추디스크, 복막염이었는데 세 번 다 오래동안 앉아서 엎드려 공부를 했을 경우에 발병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복막염일 때 桂枝加芍藥湯을 복용하고서 단숨에 나은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도 좀 무리해서 오래 앉아서 작업을 하면 늘 복부에 가스가 차고 더부룩해서 대변을 꼭 하루에 한번을 보아야만 편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제게는 아직도 따라다니는 胸滿, 정수리부위 전기감전 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胸滿으로 보고 桂枝去芍藥湯, 炙甘草湯으로 버텼는데, 마무리가 안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六經辨證으로 太陰病으로 진단을 내리고 腹滿과 胸下結硬의 소치로 太陰病 桂枝加芍藥湯을 복용하고서는 腹滿, 胸滿은 거의 못 느낄 정도이고 정수리부위는 약간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저의 행복한 체험입니다.

 傷寒論은 張仲景선생의 피눈물 날 정도의 임상진료기록서입니다. 그 당시에 많은 환자를 보면서 나온 결과물을 그 당시로는 아주 상세하게 디테일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傷寒論에는 환자의 생활 패턴과 인생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류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 질병이 생긴 동기와 과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조문에 묻어있는 인체의 메카니즘을 읽어 내려가야 합니다. 張仲景선생이 1700년 전에 행하였던 그대로 인체를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생활패턴을 이해하고, 환자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환자의 영혼을 다스리고, 마음으로 다가가서 병이 생긴 그 시점의 인체의 메카니즘을 읽어내고, 그 환자의 히스토리를 읽어내는 것이 최고의 진료패턴이고, 최고의 의사라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오롯이 傷寒論에 녹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껍질을 깨는 심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결코 학회는 여러분에게 혼돈을 주어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정보를 주기위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저의 충정과 진정성을 읽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회원 한분이 회장님은 ‘학자이지, 경영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표현을 하더라고요. 저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학자의 순수성을 가졌기에 이만큼 학회가 유지되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아마도 불순한 정치개념으로 학회를 이끌었다면 오히려 문제가 더 많을 수가 있었을 것으로 감히 예상을 합니다. 저는 이제 명예롭게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임상의로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이제 새롭게 도약할 수가 있는 초석은 다져졌다고 보여집니다.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되어서 TFT에서 나온 기획안대로 착착 진행하면 될 것입니다. 부디 최고의 한의학을 만들겠다는 공동의 선에 함께 나아가기를 부탁드립니다. 12월 15일 송년회를 겸하여 대화합의 날로 정하여 역대 학회를 위해서 봉사하신 임원과 이사진분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동안의 수고로움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회원 여러분! 저는 학회를 사랑합니다. 저는 평생 동안 학회를 위해서 헌신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대한상한금궤의학회만이 제가 걸어왔던 인생에 제 생명과도 같은 한의학의 꿈을 실현해줄 학회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학회만이 한국한의학의 미래가 걸려있고, 세계로 나아갈수 있는 유일한 학회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아래에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傷寒論을 통하여 임상의로써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그 길에 영원히 대한상한금궤의학회와 함께할 것입니다.

  저는 진작부터 인생을 3모작으로 살려고 하였습니다. 1모작은 55세까지 인생의 기초를 다지고, 56세부터 65세 10년 동안 2모작으로 명예롭게 헌신과 봉사로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66세부터는 3모작으로 자연과 함께 산에서 더불어 사는 것이 제 인생의 로드맵입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순수하고 맑은 휴머니스트와 따뜻한 카리스마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인생 히스토리를 쓰면서 많은 부분을 새삼 느끼고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더듬어 보니 초심을 잃어버린 구석이 많았습니다. 탐욕스런 부분도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하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여 모종의 결단 카드를 꺼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여론에 밀려서 일단 유보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무수히 울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이제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행복합니다. 傷寒論 본류의 신선한 작품으로 모두 함께 멀리 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新 傷寒論, 새로운 韓醫學”의 세계를 같이 열어 가시기를 거듭 당부합니다.  제 인생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